파티는 한미의 일상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직업은 파티플래너이다.

그것도 아주 잘나가는....

실력 면에서도 인정받았고, 프로페셔널하기 때문에 연예인은 물론이고 대기업 임원진 및 재벌2세들이 그의 단골 고객이다.

무엇보다 입이 무거워서 사생활 보호가 생명인 VIP들은 그들의 파티를 위해, 그를 믿고 찾았다.

 

그날도 재벌2세들끼리만의 성년의 날 파티가 있었다.

미성년자였을 때도 잘난 부모 덕에 다 누리고 살던 애들이 이제 미성년자라는 굴레마저 벗어던지니 파티는 점점 더 광란의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파티를 기획했던 한미는 분주했다. 파티의 분위기가 고조될수록 휩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미는 완벽주의자였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수시로 파티장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러다가 문득 시계를 봤다.

-어머.. 벌써 시간이....

새벽 2시가 넘었다. 한미는 직원들에게 파티 마무리를 부탁하고 서둘러 파티장을 빠져나오려는데 누군가 한미의 팔을 잡는다.

돌아보니 00그룹의 둘째아드님이자 이 파티의 후원자다. 아, 이 양반 동생도 올해 성년이 되나 보군.

- 가시는 거에요?

- 네... 오늘 파티 즐거우셨어요?

- 당연하죠... 한미씨가 기획한 거잖아요.

남자는 술에 취했는지 헤프게 웃으면서 약간 비틀거린다. 한미는 그런 남자의 살짝 팔을 잡아주곤 곧바로 팔을 거두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직원을 부르면서 손짓했다. 그걸 보고 직원이 달려왔다.

- 여기 이 분 차까지 좀 부축해 드려. 00그룹 회장님 댁 차 알지?

- 네 알겠습니다. 

남자를 직원에게 넘기려는데 남자가 갑자기 한미의 팔을 잡는다.

- 그냥 가려고요? 우리의 파티는 아직 시작도 안한 것 같은데.......

남자의 느끼한 말과 눈빛에 한미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이내 비즈니스 마인드로 상냥하게 웃으면서 남자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 디스거스팅....

그런 말을 듣자 황당한 듯 얼굴이 벌게진 채 그 자라에 아무 없이 서있었다. 한미는 게의치 않는 듯 서둘러 파티장 출구로 뛰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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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한은 무명의 연극배우이다. 그리고 연출가이다.

사실 신한이 소속된 극단은 워낙 영세하기 때문에 신한은 연출도 했다가 극본도 썼다가 무대 위에서 연극도 했다가 여러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러나 하는 일이 많은 것에 비해 수입은 형편없었다. 한번도 집세를 제 날짜에 내본 적이 없어서 집주인 아줌마한테 눈치밥을 먹고 있는 중이다. 오늘 오후에도 집주인 아주머니가 찾아와 이번달 월세는 언제 줄 거냐고 따지러 다녀갔었다.

-아유~ 아주머니~ 왜 그러세요~ 우리 한두해 얼굴 본 사이도 아닌데~

신한은 곰살맞은 표정과 말투로 아주머니께 애교를 부린다. 매달 월세를 내야하는 날이면 신한이 써먹는 수법이었다. 다 큰 총각이 저렇게 칭얼대는 게 이상하게 싫지않아 집주인 아주머니도 그리 오래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신한은 이번달에 내야할 전기세, 수도세 각종 세금 통지서를 보면서 계산기를 막 두드려보고 있다. 그러다가 결국 한숨을 푹 쉰다. 그 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신한은 서둘러 통지서를 전자렌지 안에 숨긴다.

- 오빠, 나 왔어요.

- 야, 넌 왜 남의 집 오면서 맨날 그렇게 떳떳하게 열쇠로 따고 들어오냐? 저번에 열쇠 내놓고 가랬더니 가지고 있었어?

신한의 퉁명스런 말과는 상관없이 한미가 환하게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는 봉투를 들어올린다.

- 오빠, 치킨 사왔는데... 먹을 거죠?

- 어? 치킨...? 아... 나 이번에 배역 들어가는 거... 있어서 살찌면 안되는데..."

- 그래서 안 먹는다고요? 정말?

한미는 익숙하게 식탁 위에 벌써 치킨과 콜라를 펼쳐놓고 있다.

거실에서 그걸 지켜보던 신한은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짓다가

- 나 손씻고 올동안 다리 2개 다 먹지 마

그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한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면 다시 치킨을 펼쳐놨다.

- '오다보니 좀 식었나...? 살짝 렌지에 데울까..?'

한미는 전자렌지 문을 열고 신한의 각종 고지서들을 발견했다. 몇 개는 이미 날짜가 지나 가산세도 붙어 있었다. 한미는 말없이 그것들을 자기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일정스케줄에서 신한의 월세내는 날이 지났음을 확인했다.

그때 욕실에서 신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 야, 어디서 사왔어? 길 건너 치킨집은 기름이 너무 많은데...

- 거기서 안 사왔어요. 오빠가 전에 맛있다고 한 그집에서 사온 거에요.

신한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면서 나왔다. 이미 시선은 치킨에 꽂혀있다.

- 정말? 우와...

반가운 표정으로 치킨 다리를 딱 잡으려는데 한미가 신한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맞췄다.

- 오빠.... 내가 반가워요? 치킨이 반가워요?

- 야~ 이 와중에 치킨한테 질투하냐?

다시 치킨을 집어들려는 신한을 손에 더 힘을 주는 한미였다. 그리고 더 깊어진 눈으로 신한을 바라봤다.

그 눈빛에 신한은 잠시 압도되어

- 아유~ 아무려면 닭보다야 사람이 반갑지~ 그럼~

그러자 한미의 손에서 신한의 손이 풀려난다. 서둘러 치킨을 잡고 맛있게 먹는 신한을 보니 이상하게 한미가 배가 부르다.

- '역시....우리 오빠....'

순식간에 닭다리 하나를 입으로 가져간 신한이 그제서야 한미에게 묻는다

- 야, 넌 밥 먹었냐? 치킨 안 먹어?"

- 네.... 먹었어요. 오빠 천천히 먹어요

한미가 콜라를 따라준다.

- 하긴 너는 파티장에서 일하니까 먹을 건 많았겠다 야....

신한은 음식에 집중했다. 신한이 음식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 순간이 신한이 가장 솔직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장 잘 아는 한미였다.

- 오빠, 난 누구죠?

- 응? 그게 무슨... 갑자기 뭔소리야?

입 속에 닭고기가 가득한 신한이 되물었다.

- 난 누구냐고요.... 오빠한테...

뭘 맛있게 먹고 있을 때는 맘에 있는 거 거르지 않고 바로 내뱉는 신한이었다.

- 이한미. 우리나라 제일의 파티플래너....

그러자 한미는 대답이 실망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 아니, 다시요...

그 말에 신한은 잠깐 한미의 눈치를 보더니

- 이름: 이한미, 84년생, 혈액형: AB형, 사수자리, 직업은 파티플래너, 돈 잘벌고 이쁘고 인기도 많아서 같이 다니면 자랑스런 여친이지.

- 그리고 또요?

- 음..... 그리고.... 같이 있을 땐..... 귀엽지....

그 말에 한미는 정답이라도 들은 듯 환하게 웃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한미에게 귀엽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신한이 유일했다. 또한 신한의 말대로 오직 신한 앞에서만 귀여운 한미였다. 아마 한미와 같이 일하는 사람 누구도 '귀여운' 한미를 본 적은 결단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한미더러 귀엽다고 했는데 한미는 오히려 신한이 귀엽다는 듯 신한의 뺨을 한번 쓸어내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한은 계속 치킨에만 집중했다.

어느 정도 닭이 뼈만 남아가고 있을 때 신한이 먹는 모습만 어미새의 표정으로 흐뭇하게 보던 한미가 신한에게 물었다.

- 다음 연극은 언제부터에요?

- 음.... 얼마 안 남았어. 다다음 주야.

- 이번엔 배우들 다 구했어요? 저번에도 배우 다 못구해서 오빠가 1인 5역 하고 그랬잖아요.

- 오디션 보고 있어. 이번엔 신인배우들 중에 괜찮은 애들이 좀 올 것 같아. 내일 다시 미팅하기로 했어.

- 이번 연극 제목은 뭐에요?

- 아동극이야. <선녀와 나무꾼>

- 아... 전래동화요? 그럼 오빠는 거기서 뭐해요? 나무꾼?

- 아니... 사슴...

- 사슴이요? 거기 사슴도 나와요? 아, 맞다.. 나무꾼이 사슴을 구해줬다가 선녀가 목욕하는 것으로 데려다줬죠?

- 응....

신한은 거의 마지막 남은 치킨을 잡고 콜라로 입가심을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트름 한번을 길게 했다.

- 사슴인데 왜 살찌면 안된다고 했어요? 포동포동한 사슴 귀여울 것 같은데...

한미가 벌써 사슴 옷을 입은 신한을 상상해버리고는 박수를 치며 웃는다.

- 야, 우리 연극에 나오는 사슴은 잡아먹는 사슴 아니거든? 선녀와 나무꾼을 이어주는 큐피드 같은 역할이야! 얼마나 중요한 역할인데~! 꽃사슴처럼 보여야 하니까 비주얼도 신경써야 하는데... 니가 치킨 사와서 망했어~!

이미 다 먹어놓고 신한은 또 칭얼칭얼한다.

- 아~ 꽃사슴....

이런... 한미가 또 상상해버리고 식탁에 머리를 박은 채 꺼이꺼이 웃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신한은 자신의 연극 얘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 이번에 약간 각색도 할거야. 그건 내가 하기로 했다. 동화에서는 나무꾼의 시점이잖아. 근데 우리 연극은 선녀의 시점으로 갈거야. 사실 선녀는 하루아침에 날개옷 뺏기고 나무꾼한테 강제로 시집간 거 아냐. 알고 보면, <선녀와 나무꾼>은 범죄동화다. 애들한테 아주 해로워...

신한의 독특한 해석에 한미가 정신 못차리고 웃는다.

 

닭한마리를 다 해치운 신한은 물티슈로 손을 대강 닦고 소파에 앉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신한이 각색 중인 <선녀와 나무꾼> 대본이 널브러져 있다. 신한이 원고를 다시 추스른다. 한미가 그 옆에 바짝 다가가 앉았다.

- 오빠, 근데요... 전 예전부터 그게 궁금하던데.....나무꾼은 왜 선녀의 날개옷을 태워버리지 않았을까?

- 그거야... 사랑하니까 그랬겠지. 선녀가 하늘나라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줄 뻔히 아는데 그 희망을 완전히 없애버리긴... 그렇잖아....

- 그럼 선녀는 나무꾼을 안 사랑한거에요....?

- 글쎄... 뭐... 근데 사실 거의 납치나 다름없었으니까.... 살다가 정은 들었을지 몰라도 사랑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러자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미의 눈빛이 약간 슬퍼졌다고 신한은 느꼈다.

- 내가 만약 나무꾼이라면 난 날개옷을 손에 넣자마자 불태워 없애버렸을 거에요.

- 그래... 너라면 진짜 그럴 것 같다. 하하하하

신한은 평소 시샘 많고 질투심 많은 한미니까 그럴 거라고 한미의 앞머리를 흐트러트리면서 말했다.

그러나 한미의 표정은 더욱 진지해졌다. 오히려 신한의 웃음에 신경이 거슬렸다는 듯 전에 없이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 아니, 그건 정답이 아닌데?

- 아니... 그러니까 나는.... 아유~ 내가 선녀면 처음부터 너한테 날개옷을 맡기지~ 하하하

그제서야 한미가 표정을 풀고 신한의 어깨에 기대었다.

- 만약 오빠가 선녀라면, 나무꾼을 용서할 수 있어요?

- 응?

- 날개옷을 숨기고 하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없애버린 나무꾼을 용서할 수 있어요?

- 글쎄... 화가 많이 나겠지만... 그래도 사랑하면 용서하지 않을까?

- 사랑하면...이라... 그럼, 사랑하지 않으면 용서도 없는 거네? ...... 나무꾼은 절대로 선녀한테 들키면 안되겠네... 

신한은 순간적으로 한미의 말에 서늘함을 느꼈다. 한미는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이어서 말했다. 

- 오빠, 만약에요... 내 사람이 나를 떠난다고 하면... 나는 그 사람이 가진 것들을 하나씩 부.숴.버.릴.거.에.요

그 '부숴버리겠다'는 말이 마치 어제 장난으로 만든 모래성을 허물듯이, 레고로 만든 집을 부수듯이 너무도 간단하고 쉬운 일이라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었다.

신한은 문득 그렇게 말하는 한미의 표정이 궁금해져서 자신의 어깨에 기댄 한미에게 고개를 돌려 슬쩍 얼굴을 보았다. 한미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꿈을 꾸는 듯... 마치 잠꼬대를 하는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 그러면 결국 그 사람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하게 될 거에요. 그 대신 나를 가지면 되죠. 돈이든, 명예든, 권력이든.... 나를 통해서만 가질 수 있어요.

- 우와.... 무섭다. 너... 하하하.... 이거 어디 무서워서 잠시 한눈도 못팔겠네...

신한은 애써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려고 노력해봤지만, 신한의 말줄임표로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빠르게 채워졌다.

정말 맘만 먹으면 그럴 수 있을 거란 확신과 함께...

그제서야... 생전 처음으로 신한은 한번도 가져보지 않았던 의문이 생겼다.

- '대체 얘처럼 잘난 애가 왜 나를 만날가? 나의 어디가 좋다는 걸까?

문득 신한은 언젠가는 찾아올 두 사람의 마지막이 비극이면 어쩌나 슬픈 생각이... 아니 무서운 예감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신한의 어깨에 기대어 있는 것은 평소엔 반짝반짝 빛나는 연인이 아니라 납덩이처럼 무거운 공포였다.....

그리고 또..... 한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신한을 사로잡았다.

'선녀도 과연.... 나무꾼을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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